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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 없는 돼지농장의 절규…"살처분만 하면 끝인가요"
'돼지' 없는 돼지농장의 절규…"살처분만 하면 끝인가요"
  • (연천=뉴스1) 최서윤 기자
  • 승인 2020.07.19 08: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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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복지농장 가보니…"방역 잘 된 양돈농장까지 살처분해야 하나"
정부, 접경지역 농가 돼지 입식 불허…"코로나와 다른 대응 유감"
아프리카돼지열병(ASF)이 국내 처음으로 발생한 17일 경기 파주시 발병 농장에서 방역당국 관계자들이 살처분 작업을 하고 있다. 2019.9.17/뉴스1 © News1 유승관 기자


(연천=뉴스1) 최서윤 기자 = "대출 받고 50억원 이상 들여서 동물복지 농장을 만들고 방역도 철저히 했어요. 그런데 만들자마자 관내 아프리카돼지열병(ASF)이 발병했다는 이유만으로 돼지들이 모두 살처분됐습니다. 돼지를 다시 들이려고 해도 정부에서 허용해 주지 않으니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지…."

최근 경기도 연천군 '디디팜'에서 만난 이창번씨의 한숨 섞인 말이다. 이곳은 현재 '돼지 없는 돼지농장'으로 불린다. 지난해 9월 ASF 발병 이후 이곳에 있던 8000마리 돼지들이 예방을 이유로 모두 살처분됐기 때문이다. 돼지를 다시 들이려고 해도 정부가 입식을 불허하고 있다. 농가 입장에서는 손 놓고 마냥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 정부가 '농가의 절규를 무시하고 사실상 파산을 부추기고 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7일 경기도 연천군의 한 돼지농가 사육장이 텅 비어 있다. 해당 농가는 지난해 9월 아프리카돼지열병(ASF) 영향으로 살처분이 진행 됐다. 현재까지 이동제한 조치가 해제되지 않아 돼지 농가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 2020.7.7/뉴스1 © News1 최서윤 기자

◇"농림축산식품부가 표준방역지침 주고 입식 허용해야"

지난 7일 양돈 농가 관계자들은 디디팜에 모여 연천군 및 대한수의사회 관계자들과 대책을 논의했다. 농가에서는 요구하는 있는 것은 입식이다. 사육 돼지들의 살처분이 이뤄지고 난 이후 농장은 몇 개월째 텅 빈 상태다. 정부가 입식을 차일피일 미루고 돼지를 키울 수 있는 기준도 주지 않는다는 것이 농가들의 불만이다. 몇 개월째 허송세월 하면서 동물복지 농장을 만들기 위한 농가들의 노력도 물거품이 될 위기에 놓였다.

선진국형 농장을 만들기 위해 농가에서는 축사시설을 현대화 하고 방역 인프라를 구축했다. 농장은 비었지만 시설유지에 대한 비용은 계속 발생한다. 돼지를 다시 키우고 싶어도 정부는 입식에 대한 확답을 주지 않고 있다. ASF 매개체인 북한 야생멧돼지가 언제 출몰할지 모르는 '접경지역'은 안심할 수 없다는 것 등이 이유다.

이에 농가에서는 "코로나19 방역을 위한 정부 정책을 보면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면서 일상생활을 한다. 그런데 농림부(농식품부)만 거꾸로 정책을 펴고 있다"며 김현수 장관을 원망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애초 살처분도 '사육 제한'이 아닌 '이동 제한'을 걸어 농가 스스로 포기하게 만들고 보상도 제대로 해주지 않았다는 것이 농장주들의 주장이다. 이들이 살처분 작업을 반대한 이유 중 하나는 여기에 동원된 공무원, 수의사 등이 트라우마에 시달릴 수도 있어서다.

농장주들에 따르면 지난해 9월 농림축산식품부는 돼지 농가에 이동 제한 명령을 내렸다. 돼지를 출하하지 못하게 되면서 새끼들이 계속 태어나는 바람에 돈사는 포화 상태가 됐다. 50마리가 들어가는 돈사 1곳이 나중에 100마리까지 수용하게 됐다. 돼지들이 싸우면서 꼬리가 망가졌다. 분뇨도 나가지 못하게 되니 주변에서는 악취 민원이 들어오고 환경부에 신고가 들어가면서 농장주들은 살처분 동의서에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정부가 사육 제한을 했다면 농가에서 돼지를 사육하는데 들어간 비용을 보상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이동 제한을 둬서 농가 스스로 포기하게 만들었다. 농장주들은 "정부는 보상을 했다지만 사료비 등을 제외하면 남는 것이 없다"고 말했다. 인력도 문제다. 단순 노동이 아니라 일을 가르치는데도 시간이 든다. 쉬는 동안 인건비를 지급하기도 힘들고 휴직 처리했다가 다시 데려오는 것도 쉽지 않다. 농가는 그야말로 속수무책이다.

이날 농장주들은 정부에 입식을 허가해 달라고 요청했다. 수의사들에 따르면 ASF는 공기 중 전파가 아닌 직접 접촉해야 감염되는 질병이다. 농가 돼지가 멧돼지와 접촉을 해야 감염이 된다는 것이 이들의 설명이다. 농장 안으로 멧돼지가 들어올 수 없도록 하고 방역을 철저히 한다면 걱정할 것이 없다는 얘기다. 가축방역심의위원회도 현장 전문가가 아닌 교수 등으로 구성돼 농가의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오명준 ASF 희생농가 총비상대책위원회 사무국장은 "정부가 필요할 때는 희생을 강요하면서 제대로 된 후속조치를 이행하지 않는다면 어떤 국민이 정부를 신뢰하겠나"고 반문했다. 이어 "유럽 등 외국에는 2월까지 야생멧돼지를 잡겠다고 호언장담한 정부가 집돼지만 잡았다"며 "정부가 표준지침을 주면 그대로 이행하겠다. 이제라도 입식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해달라"고 호소했다.

경기도 연천군의 한 돼지 농가 앞에는 '멧돼지 살리려다 양돈농가만 잡았다'며 정부와 지자체를 규탄하는 내용의 현수막이 걸려 있다. © 뉴스1 최서윤 기자

◇냄새나는 돼지우리? 양돈 농가, 환경 개선 위해 노력

지난해 9월 ASF 발병 이후 접경지역인 경기도 김포, 파주, 연천군과 인천시 강화군, 강원도 철원군(일부)에서 사육하고 있는 38만여 마리의 돼지들이 모두 살처분됐다. 디디팜은 경기도가 인증한 가축행복농장이다. 하지만 8000마리 돼지들의 희생을 막을 수는 없었다. ASF 발생 농가와 3㎞ 이상 떨어져 있고 방역 시설을 갖춘 다른 곳들도 살처분을 피하기 힘들었다.

양돈 농가에 따르면 '어차피 먹는 건데'라고 해서 돼지를 고통 속에 살게 하다 보내는 시절은 지났다. 농가에는 2세 경영이 시작되고 있다. 이들은 돼지 사육을 위해 공부도 하고 유학도 간다. 방역 시설 등도 잘 갖춰놓고 동물복지 농장을 운영하기 위해 애쓴다.

실제 농장에 들어가 보니 이전에 알던 일명 '돼지우리'와는 차원이 달랐다. 돼지에게는 잔반이 아닌 사료를 먹였다. 입구에서부터 자동시스템으로 운영되는 사료통이 눈에 띄었다. 사료 운송 차량이 농장 내부로 들어오지 않고 외부에서 바로 사료를 통에 넣을 수 있게 시스템을 갖춰 놨다.

방역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직원들은 농장에 들어갈 때 반드시 방역을 위한 샤워를 하고 들어간다. 농장에 비치된 신발, 방역복으로 갈아입고 발판소독조에 신발을 소독해야 출입이 가능하다.

분만실에는 어미(모돈)와 새끼(자돈)가 편안하게 지낼 수 있도록 꾸며 놨다. 동물의 습성상 약한 새끼가 도태되지 않도록 새끼의 휴게 공간도 따로 마련했다. 모돈관리표를 따로 작성해 어미의 분만시부터 건강상태를 관리하고 있었다. 돼지들이 싸우지 않고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있도록 돈사 1개당 설치된 자동 물그릇도 여러 개였다. 돼지들이 덥지 않도록 에어컨도 설치돼 있었다.

특히 이 농장에는 운동장도 있었다. 사료는 각자 먹게 하고 쉬는 시간에 운동장에 나올 수 있도록 했다. 유럽 등 해외 돼지 농가에도 운동장이 있는 경우는 드문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운동장의 경우는 시행착오를 겪고 있다. 막상 해보니 돼지들이 서열이 생겨 힘이 센 돼지가 힘이 약한 돼지의 꼬리를 물거나 괴롭히는 일이 생겨서다. 돼지의 이런 모습들도 관찰하고 어떻게 하면 발전적 방향으로 갈 수 있을지 계속 연구 중이라는 것이 농장주들의 설명이다.

농가 관계자는 "정부가 ASF 바이러스의 전염력이 얼마나 되는지 제대로 연구하고 방역시스템 설치 등도 고려해 줘야 한다"며 "이런 것들을 무시하고 확진농장 반경에 있다는 이유로 다 살처분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누가 시설에 투자하고 위생적으로 관리하겠나"고 지적했다.

이어 "방역시설 등에 따라 감염위험성이 달라지니까 기준을 명확히 세워야 한다. 방역시스템이 잘 갖춰진 곳은 다른 살처분 기준을 적용하는 등 과학적인 방법으로 접근하는 것을 검토해 달라"며 "관리를 잘하고 있는 농장과 그렇지 않은 농장은 구분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동물복지 농장의 살처분에 대해서는 동물보호단체에서도 반대하고 있다. 지난 2017년 조류독감(AI) 당시 전북 익산시의 참사랑 산란계 동물복지농장의 닭들이 살처분 명령을 받은 바 있다. 이 농장 인근에 확진농장이 있다는 이유였다.

이와 관련해 동물권행동 카라, 동물권연구변호사단체 PNR 등은 "위험도 평가 없는 기계적 살처분은 방역이 아니다"며 "생명희생 자체만으로도 안타까운데 토양과 하천에 대한 환경오염, 막대한 세금 낭비 등 2차 피해까지 부른다. 정부와 지자체는 동물복지 농장의 호소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꼬집었다.

경기도 연천군의 양돈 농장 입구에는 자동시스템으로 돌아가는 사료통이 있다. 외부 차량이 농장에 들어오지 않고 바로 사료통에 사료를 넣을 수 있게 만들었다. © 뉴스1 최서윤 기자


경기도 연천군에 위치한 돼지 농장 '디디팜'. 왼쪽 시계방향으로 어미와 새끼가 함께 지내는 돈사, 물그릇이 여러개 설치된 돈사, 대형 에어컨, 모돈관리표. © 뉴스1 최서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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